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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성공 농업을 일구는 농업경영 전문지 월간 ‘디지털농업’ 1월호 기사입니다.
여자만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숲을 ‘우리들의 아지트’라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전남 고흥, 남도의 온화한 햇살이 깃든 산자락에 자리한 치유농장 ‘봄햇살케어팜’ 이야기다. 정종권 대표의 끈끈한 가족 서사와 ‘세상에 가치 없는 것은 없다’는 그의 철학이 스며든 이 공간은 이제 숲을 넘어 마을과 지역사회로 치유의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정종권 봄햇살케어팜 대표(59)는 귀농 전 서울 대학로 인근에서 악기 제작과 콘텐츠 작업을 했다. 그러다 쉰을 바라보던 즈음 그는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인생의 후반기를 좀 더 가치 있게 살 수 없을까?’ 그 질문은 곧 가족의 여정이 됐다. 가족과 함께 전국을 돌며 ‘다음 삶을 펼칠 곳’을 찾던 중 전남 고흥에 이르렀을 때, 연고 하나 없는 땅이었지만 묘하게도 모두의 마음이 편안해졌다고 한다. 정 대표가 고흥으로 귀농하기로 마음을 굳히자 미국 이민을 준비하던 두 동생도 계획을 바꿔 함께하기로 했다.
정 대표는 2016년 고흥군 과역면의 산지를 매입하며 새로운 삶의 방향을 구체화했다. 그 선택의 중심에는 장애가 있는 큰딸이 있었다.
“어딜 가도 우리 아이가 민폐가 되는 것 같았어요. 목소리가 크고 행동도 눈에 띄니 다른 아이들이 놀라서 피하기도 하고요.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늘 눈치를 봤죠. 아이에게 ‘마음껏 놀아도 된다’고 말해줄 공간이 없었어요.”
이 절실함이 귀농의 방향을 정해줬다. 그렇다면 우리가 직접 그런 공간을 만들어보자고 말이다.
가족에서 지역으로 확장된 시선
정 대표가 경제적 기반을 다지기 위해 가장 먼저 시도한 것은 호두 농사였다. 호두 농사는 기대만큼 잘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실패로 받아들이기보다 ‘지역을 배우는 첫 단계’라 여겼다. 땅의 결을 읽는 것은 물론, 지역사회와 연결되는 일의 중요성을 확인했다. 이 과정에서 그의 시선은 ‘내 가족과 농장’에서 ‘마을과 지역 전체’로 자연스럽게 확장됐다.
정 대표와 가족들은 농장을 정비하는 한편 각자의 전문성을 살려 지역에서 다양한 역할을 맡으며 자리를 잡아갔다. 특히 주민자치위원이자 귀농귀촌협의회 임원으로, 또 귀농귀촌 정착 도우미로 활동한 정 대표는 그 과정에서 ‘마을과 함께 성장하는 치유농장’이라는 방향성을 잡을 수 있었다.
2022년 고흥군농업기술센터에 개설된 ‘치유농업 시설 운영자 교육’과 ‘사회적경제 아카데미’를 수료한 정 대표는 2023년 대구한의대학교에 국내 최초로 신설된 치유산업학과에 진학해 전문성을 쌓고 있다. 그동안 남동생은 숲시설을 관리하고 가꾸는 ‘하드웨어’를 맡고, 큰딸을 돌보며 특수 교육 분야에서 전문성을 쌓았던 아내와 여동생은 프로그램 개발과 운영에 힘을 더했다.
일련의 교육과 가족의 협력을 바탕으로 치유농장 조성 계획을 구체화한 정 대표와 가족들은 2024년 치유농장으로서 봄햇살케어팜 운영을 본격화할 수 있었다.

다양한 계층에게 열린 공간 지향
3만 3000㎡(1만 평) 규모의 숲은 정 대표와 가족들이 오랜 시간 손으로 가꿔온 공간이다. 나무 사이를 가로지르는 짚라인과 로프브리지, 잠시 몸을 눕힐 수 있는 그물 쉼터와 해먹, 곳곳에 자리한 트리하우스와 오두막까지. 숲놀이터라 지칭하고 있지만 단순한 놀이시설이 아니라 방문객이 온 감각을 열어두고 자연과 마주할 치유 환경으로 완성되고 있다.
도토리·대나무·돌멩이·풀잎 같은 주변 자연물은 전통 놀이와 공예, 식문화 체험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크나이프(물 치유법)·아로마세러피·싱잉볼 같은 치유 기법이 더해지며 치유농업 프로그램의 결은 더욱 풍부해졌다.
현재 봄햇살케어팜은 지역 내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 장애인복지관에서는 직업적응훈련팀과 주간보호팀이 연중 농장을 찾는다. 이 경우에는 씨앗을 심고 모종을 키우는 일에서 출발해 수확과 팜파티로 이어지는 ‘한 해의 흐름’을 함께 경험하는 것이 큰 줄기다. 활동을 진행하면서 대상자의 특성에 맞춘 치유 요소를 자연스럽게 배치한다.
가족센터와 연계한 조손가정·이주여성·예비부모 프로그램은 4~5회차로 진행되는데, 이때는 농작업보다 쉼과 안정감에 무게를 두고 운영한다.
한편, 봄햇살케어팜은 교육청의 중심마을학교로 지정돼 숲·농촌·마을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배움의 구조를 만들고 있다. 교육 과정과 연계된 생태교육도 진행하지만 아이들 스스로 배우고 성장할 수 있도록 밑거름 역할을 한다. 실제 숲속 오두막은 학생들이 설계 단계부터 참여해 직접 만든 결과물이다. 자신들이 손을 보탠 공간이 생긴 뒤 아이들은 그 오두막을 아지트라 부르며 애정을 드러낸다.
“봄햇살케어팜은 다양한 계층, 다양한 성격의 방문객이 부담 없이 찾아와 놀고 쉬면서 치유를 경험할 수 있는 열린 공간으로 운영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치유농장 넘어 치유마을을 꿈꾼다
정 대표가 귀농 이후 꾸준히 실천한 지향은 ‘마을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농장의 작업이 한창일 때도 마을에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달려갔다.내친김에 정 대표는 주민들을 설득해 다양한 마을공동체 사업을 진행했다. 옛 지명과 전설을 기록해 마을 이야기 지도를 만들고, 마을 초입에는 장승·솟대가 어우러진 정원을 조성했다. 벽화 사업은 귀향한 이들이 더 반겼고, 최근에는 숲과 마을을 잇는 꽃길 산책로도 만들고 있다.
“우리 농장만 잘된다고 되는 게 아니죠. 지역과 함께 성장해야 오래가요”라는 정 대표의 말처럼 마을 주민과의 관계는 자연스럽게 두터워졌고, 농장 역시 주변과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춰갔다.
정 대표는 고령화 마을에서 어르신들이 병원이나 요양원에 가지 않고 자기가 살던 집에서 돌봄을 받을 수 있는 프로그램도 치유농업의 한 갈래로 풀어갈 수 있을 거라 내다봤다. 아직 바우처 기반의 치유 서비스 지원이 정착되지 않은 상태라 언제쯤이면 실현할 수 있을까 막막한 부분도 있지만 그는 하나하나 연결고리를 만들고 있다.
지난해에는 유자·복숭아·커피·꽃차·숙박·가공 등 각자의 영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이웃들과 뜻을 모아 협동조합을 꾸렸다. 특화된 콘텐츠를 연계한다면 고흥에 맞는 치유관광을 구현할 수 있을 거라 확신한다. 이 기획은 농촌신활력플러스 사업 지원을 받아 치유관광 프로그램 모델을 개발 중이다. 사업의 성과가 쌓이면 폐교를 활용해 마을을 활성화하는 사회적경제 프로그램으로 확장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정 대표의 다음 목표는 봄햇살케어팜에서 나아가 마을 전체를 통합형 치유마을로 만드는 것이다.
“폐교를 구심점으로 숲·농장·협동조합·마을을 연계해 지역소멸 위기의 마을에 사람들이 찾아오고, 일자리가 생기고, 주민들의 삶의 질이 향상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고자 합니다. 3년 내에 치유관광마을로 자리 잡길 바라며 마을공동체 사업을 심화·확장하고 있습니다.”
장애가 있는 딸이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을 만들겠다는 한 아버지의 선택은 고흥의 한 마을을 넘어 더 넓은 지역으로 천천히 그러나 단단하게 그 영향력을 퍼뜨리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저희 큰딸을 보면 참 안 됐다, 우리에겐 얼마나 힘드냐 그러는데, 저는 다르게 생각해요. 그 아이 덕분에 우리가 한데 모여 끈끈하게 살아가고, 보람 있는 인생을 살게 됐다고 생각해요. 세상에 그 무엇도 가치 없는 것은 없어요.”
글 서진영 | 사진 남윤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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